한국에서 차 문화는 언제부터 시작되었을까요? 요즘 우리 주변곳곳에 넘쳐나는 카페들처럼 고려시대에는 곳곳에 차를 파는 가게들이 많이 있었고 지금의 우리가 커피를 즐기는 것처럼 차를 즐겼다고 합니다.
시대가 변화하며 차에 대한 우리나라 사람들의 관심은 많이 줄어들었지만 커피보다는 어떤 면에서 많은 장점을 지녔고 몸에 좋은 성분들도 많이 포함하고 있다고 하는 차를 즐기는 문화가 다시 한번 더 유행하는 날이 올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그럼 오늘은 옛날 조상님들은 차를 어떻게 마시게 되었을까에 대해서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1. 한국 차문화의 시작은 신라의 기록에서
우리나라에서 언제부터 차를 마시기 시작했는지에 대해서는 아직까지 정확하게 정립된 것은 없습니다. 하지만 차 도입에 관해서 가장 유명한 기록이라고 하면 [ 삼국사기 ]에 나오는 다음의 기록이라고 합니다.
" 신라 흥덕왕 3년에 신라 사신 김대렴이 당나라에서 차의 종자를 가져와 지리산에 심게 하였다. 차는 신라 27대 선덕여왕 때부터 있었지만 이때에 이르러 성하였다."
그리고 신문왕에게 설총이 지어서 바친 [ 화왕계 ]라는 이야기에 보면 '차와 술로서 정신을 맑게 해야 한다.'라는 내용이 나온다고 합니다. 신라 시대의 이러한 기록들을 보면 이 시대에 이미 차를 마시고 있었다는 것을 알 수가 있습니다.
2. 백제에서 나온 증거들
그런데 최근의 주장에 의하면 신라보다 앞서 백제에서 이미 차를 마셨다고 합니다. 우리나라에서 차 생산이 가장 많은 지역인 전라도 지역은 백제가 자리했던 곳입니다.
백제는 차나무가 자라기 좋은 지리적 여건을 갖추고 있었고 차문화가 발달해 있던 중국 화남지역의 나라들과도 교역이 많았습니다. 그리고 백제지역에서 중국제 자기가 많이 출토되고 있는 것 또한 이러한 주장을 뒷받침해주고 있습니다.
충남 공주 수촌리에서는 높이 23cm 크기의 닭머리 모양이 장식된 주전자가 출토되었으며 이는 중국에서 수입한 것으로 5세기 무렵의 것으로 추정됩니다. 풍납토성에서는 돌절구(차를 빻기 위한 도구)가 출토되었습니다.
이러한 증거들로 미루어보면 백제는 일찍부터 차를 마시고 있었다고 추정해볼 수 있습니다. 당시의 차는 찻잎을 분말로 갈아서 쌀가루를 푼 풀과 섞은 후 차병(덩어리차)를 만들어서 말린 후, 차를 마실 때마다 이것을 찧고 빻아서 뜨거운 물을 부어 파, 생강, 소금 등을 타서 마셨다고 합니다. 이때 차를 빻는 돌절구가 필요합니다.
3. 고구려에서는
고구려의 기후는 차를 재배하기에는 너무 추웠고, 대외관계에 있어서도 차 문화가 발달하지 않은 북조의 나라들과 교류가 많아 이러한 여건으로 인해 차 문화가 발전하기는 어려웠습니다.
중국에서는 차를 공양하는 것을 수행의 한 방법으로 여겨서 스님들이 차를 즐겨마셨다고 하는데 이는 기존의 차 문화를 불교가 수용한 것이라고 합니다. 북중국의 불교를 받아들였던 고구려에서 스님들이 차를 공양하는 풍습이 당장 생겼다고 보기는 어렵습니다.
무용총의 북벽에는 무덤의 주인이 스님을 접대하는 모습이 보이는데 이것을 차와 과자를 대접하는 모습으로 보기에는 무리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과자는 7세기 당나라 시대에 들어와서야 등장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고구려가 중국과 교류하며 차의 존재를 알기는 했을 테지만 백제와 같이 차문화가 발전하지는 못했을 것입니다. 고구려 지역에서 출토되는 중국의 자기의 수도 상대적으로 적다고 합니다.
4. 고려, 차문화의 전성기를 꽃피우다
고려시대에는 연등회 행사를 하면 왕이 태자 이하 신하들에게 차를 하사하고, 신하들은 차를 내려준 왕에게 감사의 뜻으로 차를 마시고 인사를 했다고 합니다. 또 왕은 총애하는 신하가 죽었을 때도 차를 하사하였는데 이것은 상례를 치르면서 손님을 대접할 때 많은 차가 필요할 정도로 그 당시 차 문화가 성행하고 있었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송나라 사람이 쓴 [ 고려도경 ] 에는 '고려 사람들은 차 마시는 것을 좋아하는데, 송나라의 납차, 용봉사단차를 귀하게 여겨 송나라 상인에게 많이 구입한다.' 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또 사신에게 차를 대접했을 때 사신이 차를 다 마시면 기뻐하고 차를 남기면 자신을 깔본다고 생각하여 불쾌히 여겨 억지로 차를 다 마셨다고 하는 이야기가 있다고 합니다.
외교적으로도 거란, 금, 원나라에 차를 보내거나 외국사신을 영접하는 예빈시에서 차를 내는 일이 가장 주요한 일이었다고 합니다. 또 차에 대한 전반적인 일을 맡기는 다방내시라는 제도도 마련했었고 의종이 현화사를 방문했을 때 스님들이 차를 마시기 위한 정자를 설치해서 임금께 차를 바치기도 했다고 합니다. 사찰에서는 차를 전문적으로 생산하는 다촌을 만들기도 하고, 차에 필요한 그릇등을 직접 구워서 사용하기도 했다고 합니다.
[ 세종실록지리지 ]의 기록에는 고려시대에 차를 전문적으로 생산하는 다소(장인집단들의 행정 구역) 가 21개소나 있었다고 적혀있습니다. 이처럼 정부에서도 차 생산을 집중 관리하며 장인들이 전문적으로 차를 생산해 내면서 차의 종류도 다양해지고 차를 마시기 위한 여러 가지 다구와 다기의 제작도 활발해져 자기 문화의 발전에도 크게 기여했다고 합니다.
고려시대에는 차를 파는 다점이라는 것이 있었습니다. 처음에 왕실과 사원을 중심으로 유행하던 차 문화는 차의 생산이 많아지면서 민간으로 널러 퍼져 일반 백성들도 차를 마시게 되었습니다.
고려시대에 다점은 주점과 더불어서 일반 백성들이 적은 돈으로 쉽게 이용할 수 있는 곳이었습니다. 고려의 길에는 역원이라고 해서 관리들이 쉬어갈 수 있는 곳이 있었는데 이러한 역원 가운데 차가 유명한 원을 다원이라고 했다고 합니다.
5. 차례
차례라는 뜻은 본래 차를 신이나 조상에게 올리는 의식이었다고 합니다. 신라 충담사에서는 미륵부처님께 차를 올리는 공양을 했고 국가 의식에서는 차를 올리는 진차의식이라는 것이 있었다고 합니다. 진차의식이란 임금에게 술과 과일을 올리기 전에 임금이 먼저 신하에게 차를 청하면 신하가 차를 올리는 것입니다.
고려시대에는 연등회, 팔관회에서 진차의식이 행해졌고 사신이 왔을 때나 왕자책봉, 공주를 시집보낼 때와 같은 의식에서도 차례가 행해졌었다고 합니다.
6. 차소비 점점 줄어들다
조선시대에 와서 차의 생산량이 크게 줄어들게 되자 차 가격이 비싸졌고 그로 인해 차례에서 차를 대신해 술을 올리게 되었다고 합니다. 차의 생산이 줄어들게 된 이유는 조선이 불교를 배척하면서 사찰의 재정이 나빠져 사원 주변에 많이 있던 차밭이 관리가 되지 않아서였다고 합니다. 또 1480년~1750년까지 기온이 크게 떨어져 차 생산이 잘 되지 않았다는 이유도 있다고 합니다.
그럼에도 청나라에 공물로 보내야 하는 차의 수량은 늘었고 이로 인해 차에 대한 세금은 늘어났습니다. 많은 세금을 내야하는 차 생산을 백성들은 더욱 기피하게 되었습니다. 양반들조차도 차에 대한 세금이 부담스러워 차를 마음대로 마시지 못할 정도였다고 합니다. 차의 가격이 과하게 비싸지면서 차의 소비량은 결국 줄어들게 되었습니다.
7. 앞으로 한국의 차문화는?
19세기 들어서부터 차를 마시는 풍습은 되살아나기 시작했지만 대중적으로 일반화되지는 못했습니다. 1970년대 후반부터 차의 보급이 활발해지고 1990년대 이후에는 건강식품으로써 많은 각광을 받고 있으며 최근 들어서 차의 종류도 많아지고 생산도 늘어나고 품질도 좋아지고 있습니다.
하지만 한국인이 소비하는 커피와 차의 소비량의 비율은 30:1이나 될 정도로 그 차이가 큽니다. 우리 나라의 차문화가 다시 한번 전성기를 맞이하려면 새로운 시대에 따른 변화를 잘 수용해야 할 것으로 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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